키치

가수 싸이가 등장했을 때, 많은 이들은 기존 ‘대중문화 풍속도’와 다른 B급 감성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좀 생기고 가창력도 뛰어난, 암묵적으로 합의된 질서에 순응하는 기존 음악계와는 180도 다른 행보였기 때문. 그가 보란 듯 선보인 ‘주류’를 비꼬는 해학과 파격적인 무대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 20년간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작지 않은 이정표를 세웠다. 모더니즘 시대까지 숭배하던 ‘질서’와 ‘규칙’을 배반하고 ‘파격’과 ‘해체’를 무기로 삼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접 어들면서 ‘B급 감성’을 대표하는 ‘키치’(Kitsch) 문화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_ 김고금평 머니투데이 문화부 차장


‘키치’ 문화의 시작

문화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강박, 작품성에서 오롯이 예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서서히 깨졌다. 일상 어디에서나 누릴 수 있는 예술의 기쁨은 키치 문화가 던져 준 가장 큰 공로다.
키치 개념의 시작은 여전히 논란 중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1870년대 뮌헨 예술시장에서 처음 만들어져 값싸고 시장성이 높은 그림이나 조각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그 무렵 독일을 여행한 영국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기념품으로 사간 시골 풍경 ‘스케치’를 잘못 발음해서 지금의 단어로 굳어졌다거나 ‘싸게 만든다’는 의미의 독일어 동사 ‘verkitchen’이 축약된 것이라는 스토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헐값에 팔리는 조악한 그림을 뜻하던 키치는 당시 진지하고 난해한 예술품을 감상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뮌헨 신흥 부르주아들의 ‘체면을 유지시키는’ 문화 향유 방식이었다. 모방적 취미를 통해서라도 상층계급을 향한 ‘동질 의식’을 느끼고 싶었던 셈이다.
키치는 이렇게 특정한 문화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오락의 대용 문화로서 등장했다. 계급이 형식적으로 사라진 현대사회에선 내적 열등감을 모면하려는 ‘아래’층의 대항문화로서, 또는 더 재미있고 기발한 콘텐츠를 섭취하려는 문화 포식의 욕심에서 키치는 해석된다.
다시 말하면 고급문화나 고급예술과는 별개로 대중 속에 뿌리박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 바라볼 수도 있고(따라서 대중문화 시대흐름을 형성하는 하나의 척도로 기능), 미학적으로 ‘우수한’ 특정 작품의 어떤 경향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도 파악된다. 역설적이지만 키치를 지향하는 작품들은 팝아트 이후 고급예술 전반을 장악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지배적인 경향이 된 것이다.

싸구려처럼 보이려고 하는 예술

키치는 모호하고 복잡한 다층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벼움, 무의미, 통속성을 지칭하는 ‘실체’로 존재한다. 고미술품을 모방한 가짜 복제품이나 유사품, 통속 미술작품 등은 물론이고 미켈란젤로의 ‘모세’와 같은 걸작품을 석고나 플라스틱으로 복사한 가정용품처럼 조악한 감각으로 만들어진 미술품과 저속한 대중적 취향의 문화들이 그 대상이다.
키치는 이런 이유로 본래의 기능을 거부하는 특성, 충동이나 수집의 특성, 값이 싸야 하며 축적의 요소를 가지는 특성, 낭만적 요소를 포함하며 상투성과 쾌적함의 요소를 가지는 특성 등을 두루 지닌다.
우리나라에서 ‘키치’는 처음에 ‘유치’와 동의어였다. 가령 가을 추수가 끝난 전원풍경이나 새끼 젖을 물리는 어미 돼지같이 이발소 벽면에 차지한 그림들이 대표적.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만, 미적수준은 한없이 저급한 싸구려 작품들은 수십 년이 지나 중장년 세대에겐 또 다른 기억의 재미로 다가오는 ‘레트로’로, 새로운 창작품으로 보는 신세대들에겐 ‘뉴트로’로, 어떤 세대에겐 레트로를 살짝 변형해 기발한 유머를 창조하는 ‘키치’로 수렴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식의 어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집이나 에세이들, TV 드라마나 음악 프로그램 등 일상 곳곳에 드러나거나 숨겨진 모든 것들이 ‘키치’의 흔적들이다. 팝 아티스트인 앤디 워홀이 코카콜라 병, 마릴린 먼로 등의 이미지를 통해 천박함, 반복과 단조로움에 축복의 세례를 내린 것도 키치 문화 확장의 주요 근거다.
키치는 그러나 무조건 ‘B급 감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키치는 B급을 당당히 표방하는 예술이 아니라, 겉으로는 A급인 것처럼 포장하는 예술이다. B급 철학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을 ‘캠프’(camp)라고 정의하는 데서 차이점이 드러난다. 싸이의 작품은 키치로 시작해 캠프로 완성된 결과물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치든 캠프든 지금 시대에 ‘싸구려처럼 보이려고 하는’ 예술 대부분은 키치로 통용된다.

모방과 창작의 ‘한 끗 차이’

키치가 이 시대에 ‘먹히는’ 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사람들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으로 기술하기 때문이다. 두려운 세상을 반영하는 부정의 키치 이미지에서도 고통이나 절망은 실체가 없는 ‘멸균된 슬픔’으로 그려지기 일쑤다. 긍정과 평화, 기술과 자본의 시대가 주는 ‘희망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문화 코드인 셈.
밀란 쿤데라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의 성격을 ‘똥의 절대적 부정’이라고 표현하며 키치는 현실의 더러움, 어려움은 절대로 재현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키치는 A급을 따라 하려는 B급의 ‘모방’이라는 점에서 저작권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흔히 풍자적으로 비꼬거나 아주 옛날 콘텐츠라는 이유로 저작권 침해와 상관없을 거라 여기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의 한 디자이너는 1970년대풍 서체로 로고 작업을 하다 저작권 침해로 곤란을 겪었는데, 실제론 1970년대 서체가 아닌 2010년대 서체였다. 저작권과 거리가 먼 수십 년 전 콘텐츠라도 모방의 대상이 있다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절차다.
차용예술의 저작권 침해 논란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은 제프 쿤스다. ‘포스트모던 키치의 제왕’이라 불리는 그는 기존 창작품을 허락 없이 빌려와 과감하게 모방하며 ‘재창조’를 선언한다. ‘겨울 사건’이라는 작품의 제목과 조각을 그대로 베꼈다는 이유로 2018년 프랑스 광고 제작자로부터 표절 소송을 당한 제프 쿤스는 거액의 손해 배상금을 내야했다. 하지만 그의 ‘모방’ 작품이 항상 표절 판정을 받은 건 아니다. ‘한 끗 차이’로 고유한 창작품이 될 수도, 모방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위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교묘한 저작권 침해 여부를 법원은 앞으로 어떻게 판단할까. 일상에 더 깊이 파고든 ‘키치’에 대한 논란은 예술적으로도, 법적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